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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이야기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의거

by 국향(菊香) 2017. 2. 13.

안중근 의사의 생애와 의거

 

 

2월 14일이 발렌타인 데이라고

세상이 온통 초코릿 천지인데요,

발렌타인 데이만 좋아하지 말고

이 날이 무슨 날인지 돌아보고 기념하자는

개념 젊은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오늘이 무슨 날인가 알아보았더니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래요.

우리나라가 광복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은

독립운동이 큰 힘이 되었기 때문이지요,

하얼빈역에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통쾌한 의거는

우리의 가슴 속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 같아요.

 

안중근 의사의 의거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

헤이룽성 하얼빈 에서 울린 총성.

총을 맞은 사람은 일본의 거물 이토 히로부미,

총을 쏜 사람은 조선의 30대 청년.

이 청년은 총을 쏜 직후 체포되었으며,

"코레아 우라"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습니다.

이 청년은

뤼순 감옥에 갇혔다가

1910년 3월 16일,

서른 세살의 젊은 나이에 처형되었습니다.

이 청년이 바로

안중근 의사입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친다. "

안중근 의사의 유명한 어록이죠.

 

안중근 의사의 생애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의 부호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서

북두칠성의 기운을 타고 태어났다며

아명을 응칠(應七)로 짓게 되었지요.

어린 시절에는 한학(漢學)을 배웠지만

무술 공부에 더 열심이어서

화승총을 메고 포수들을 따라 사냥을 다녔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사격 실력이 여기에서 길러진 것 같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 신자였는데

동학당에게 노획한 많은 쌀을 군량미로 사용한 것이 문제가 되어

명동 성당으로 피신해다가

자연스럽게 천주교 강론을 들은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도마(Thomas)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이런 과정에서 신학문을 접하게 되었으며,

젊은이들의 실력과 독립 사상 고취를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그동안의 사업을 정리하고

삼흥학교와 돈의학교를 통해 인재양성에 힘썼습니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이 체결되자

연해주로 가서 의병운동에 참가했고

많은 조력을 받아 무기와 자금을 마련하여

국외 의병 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의병활동 중에

3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철저한 계획을 세워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데 이르게 된 것입니다.

 

144일의 수감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안중근 의사는

우리나라 항일 활동의 기폭제가 되어

한일 합방이 되어 일제 강점기 되었을동안에도

끊임없는 독립군 활동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입장에서야

우리의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다 암살자다 말하겠지만

그들이야말로 침략자이고

침략자에 저항한 것이

바로 우리의 민족성인 것입니다.

 

2월14일,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

안중근 의사의 정신만은

영원히 이 대한민국에 살아있을 것입니다.